의병활동
최세윤은 1896년 같은 고을의 장상홍(張相弘), 정래의(鄭來儀)
등과 함께 의병 400여명을 규합하여 안동의진의 의장 김도화
진중에 들어가 아장(亞將)의 직책(안동의진 左翼將)을 맡았다.
예안의 의병장 향산(香山) 이만도(李晩燾)와 연결되어 군무
(軍務)를 의논하여,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고종이 의병을 해산하라고 권고를 함에 따라
의병들이 거의 해산될 무렵에도 최세윤은 의병을 해산하지 않고
그 해 5월하순, 영양군으로 가서 그때까지 동해안 일원에서 계속
항쟁을 하던 김도현 진영에 합세하여 의진항쟁에 큰 기여를 하였
다. 그 후 김도현의진이 해산됨에 따라 향리로 돌아와 학림강당
(鶴林講堂)에서 인근 고을의 제자를 교육하며, 방조(防祖)가 되는
농수선생문집 (農叟先生文集) 속집을 족형 홍식과 같이 간행하면
서 훗날을 기약하였다. 훗날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산남의진
(山南義陣)에 참여하여 3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지역에서는 최세윤 뿐 아니라 영일 기계(杞溪) 현내(縣內)리
출신인 이종흡(李鍾翕)이 1896년 안동에서 김도화 의병장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남의진은 을사늑약 직후 1906년 3월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고종의 밀지를 봉행하여 영천에서 1,000여 명의 의병으로 창의하여 제3대 최세윤 의병대장이 체포되는 1911년 9월까지 약 5년 동안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의 성격과 의의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측근이었던 정환직이 황제로부터 밀조(密詔)를 받아 창의된 공식적인 의진이었다. 때문에 의병의 모집과 군기의 조달, 군수품의 조달 등이 다른 의진들 보다 용이하였다.
둘째, 의진 인물들의 출신 지역이나 의진 활동 범위가 경북은 물론 경남지역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 동안 일군경과 130여 회의항전을 치르고, 약 7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의병진으로서, 항전기간, 항전횟수 등으로 볼 때 당시 영남지역 의병진 가운데 규모도 가장컸다. 그래서 산남의진은 진호 그대로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의진이었다.
셋째, 의진의 대장이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정용기, 정환직, 최세윤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가 이어졌다. 이런 사례는 국내 의병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넷째, 서울 진공작전을 선구적으로 계획한 점이다. 비록 이 작전이 구체화되어 단독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또한 정미의병 때 ‘13도의병 연합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서울에서의 결전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는 한말 전국의 의병항쟁의 마지막 과제였던 서울 진공작전의 선구적인 발상이 되었던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섯째,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는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3.1운동에서도 활발하게 참여했던 경우가 확인된다. 이것은 의병운동과 민족운동 나아가 3.1운동과의 관계 설정에 유의미하다.
특히 정용기 대장은 1907년 영천지역에서 ‘국채보상 단연회’ 회장에 추대된 바 있었고, 양제안(梁濟安) 역시 1905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후에 아들인 양한기(梁漢紀)와 같이 죽장 두마리에 사립학교를 세워 후세의 독립정신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도총장을 지낸 김용본 (金用本)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때 ‘단연회’에 솔선 참여하였다. 또 최세윤은 1896년 안동의진 참여 후 향리의 학림학당에서 교육 활동에 종사한 바 있다.
이러한 경우는 의병운동과 계몽운동과의 관계가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있었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욱(鄭成郁)은 포항 청하의 3.1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장준호(張俊灝)도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이는 의병운동과 3.1운동의 관계를 파악하는데도 단초가 될 수있다.
여섯째, 산남의진은 전기의병의 계승적 의의를 갖는다. 의진 지도부의 최세윤, 구한서, 정래의, 이순창 등은 전기의병 때 직접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또 홍구섭은 안동의진 후선봉장 홍병태의 아들로서, 장영집사 김진영은 청송의진 중군장 김대락의 아들로서 본 의진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이준구,양제안 등 전기의병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따라서 산남의진은 전기의병의 계승적 의의를 갖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곱째, 산남의진의 항일투쟁은 국외, 즉 만주지역 독립운동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점이다. 산남의진에서 활동하던 인물 중 우재룡, 임중호, 양제안, 오치운, 손수조, 최차돌, 최돌이형제 등과 같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만주로 옮겨가 활동하였던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마지막으로 문중(門中) 단위의 참여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환직 일가의 경우는 정환직, 정용기, 정옥기3부자를 비롯하여 그 일족 20여 명이 참가하였다.
여강이씨의 경우 이한구, 이경구, 이순구 3형제와 외숙(성낙희)까지 참여하였고, 죽장 매현의 월성 손씨 문중 경우에는 문회(門會)를 열어 문중 전체가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특히 손영각의 경우 동생인 손영준 등 형제들과 여서(女壻)인 구회수(具會守)까지 참여하였다. 청송 월매의 영양남씨는 남석구를 비롯 그 일족 18명이 참여했다. 홍구섭(洪龜燮)과 홍우섭(洪禹燮)은 형제지간으로 1896년에 결성되었던 청송의진의 선봉장 홍병태(洪秉泰)의 장남과 차남이다.
김수달과 김운달, 최돌이와 최차돌, 정치석과 정치우, 이형표와 이형윤, 성낙희와 성낙호도 각각 형제지간이다. 서인찬(徐仁讚)과 서종표(徐仲杓)는 아제비와 조카간이다. 그 외에도 안동권씨, 능성구씨, 한양조씨, 영천 황보씨 등 족중(族中)이나 6촌 이내의 집안 단위의 참 여자가 많았다는 점도 산남의진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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